우화

결국은 (2019. 3. 22.)

Bogaeng 2019. 7. 9. 22:29

형, 우리는 결국 이 풍경을 위해 달려왔나 봐요.
바람은 가끔 볼을 스치고 있었고, 이제 막 푸르름을 되찾은 잔디는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형은 대답이 없었다.
그래 결국 형은 이 사각 돌 아래 묻혀 있을 뿐이니까.
형의 얼굴엔 주름이 없었다.
우리는 아직 어렸다.
이런 상황을 이해하기에도 어렸는지 모르겠다.

가끔 난 형에게 사람은 그저 뼈와 살로 이루어진 컴퓨터가 아니냐고 말했다.
형은 헛소리 하지 말라고 다그치기 일쑤였다.
그럼 나는 다시, 우리가 누군가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은 그의 존재가 사라져서가 아니라 그와의 소통이 단절되기 때문일 뿐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형은 피식 웃으며 소주 한 잔을 들이켰다.
그럼 나도 한 잔 마시며 답답해 했다.
나는 나 자신도 뼈와 살로 이루어진 컴퓨터라고 생각하는걸.

그 해 봄, 형은 결혼할 거라고 말했다.
"언제요?"
형은 언젠가, 돈이 모이는 대로 바로 결혼할 거라고 말했다.
그래 형이 결혼을 빨리 하고 싶은 것도 당연하지.
형의 여자친구는 내가 봐도 천사였다.
결혼 제도를 비웃고, 결혼을 혐오하는 나로서도 그 사람은 인정할 만한 상대였다.
"그래요 그럼 형 결혼하면 내가 100만 원 낼게요."
형은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며 피식 웃었다.
나는 진짜 낼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우리는 소주를 좋아했다. 닭똥집에 소주. 피자에 소주. 과자에 소주.
소주를 마실 때면 우리의 가난 같은 건 어찌 되어도 좋았다.
웃고 떠드는 시간만큼은 우린 자유로웠다.
그래서 우린 서로의 술친구였다.

그러던 형이 술을 안 마시겠다고 한 건 작년 가을이었다.
"형 웃기는 소리 하지 마요."
형은 피식 웃을 뿐이었다.
실없는 웃음. 나는 형의 그 웃음이 싫었다. 내가 애야? 왜 맨날 말을 안 해. 자기 혼자 다 떠안을 수 있어? 슈퍼맨이야?
그래 형이니까 참는다. 무슨 사정이 있겠지.
나는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고 홱 돌아섰다.

그리고 형을 다시 본 건 새하얀 침대 위에서였다.
참내 무슨 20대가 암이야?
"형 웃기는 소리 하지 마요."
어? 안 웃네. 형은 눈을 감은 채였다.
결혼한다는 사람이 이러고 있어도 되냐고. 따져 묻자 그제서야 형은 눈을 슬쩍 뜨고 후 하고 숨을 내쉬었다.

형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나는 분명히 사람은 컴퓨터라고 생각했다. 죽음은 컴퓨터가 고장나는 것과 같다. 단지 우리가 그것에 심하게 연연하는 것은 우리 자체도 컴퓨터일 뿐이기 때문일까. 형이 고장난 다음에 나는 어떻게 되지?

형을 찾는 일이 잦아졌다.
형은 참 힘도 없이 누워있었다.
나는 뭐 누가 사귄다더라 헤어졌다더라 의미 없는 이야기들을 형에게 해 주었다.
형은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형이 나왔다. 형과 나는 한 데 뒤엉켜 물감이 섞이듯 하나가 되었다가 흩어졌다.
흩어진 형을 잡으려 해도 가루처럼 잡히지 않아 답답했다.
아오 씨발, 욕을 내뱉고서야 난 꿈에서 깨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형의 얼굴은 영정 사진으로밖에 남지 않았다.
국화 뒤에 세워져 있는 꼴이라니.
형, 허망하네요.

이딴 비석 누가 마음에 들어한다고.
화강암 무늬도 싸구려 같아.
형은 그저 고장났을 뿐이잖아.
분명히 방법이 있을 거야. 있었어야 했는데..
미안해요 형. 내가 방법을 못 찾아서.
형, 고장날 거면 혼자 고장나지 왜 나까지 힘들게 해요.
다음엔 얌전히 왔다 가라구요, 술 같은 거 먹지도 말고.

고장난 형은 여전히 땅 밑에 묻혀 있다.
나도 저성능인가 보네, 이 정도 일에 망가지는 거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