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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화

이탈 - 도망 이후 -

이탈(離脫)

- 도망 이후 -



1. 낙조(落潮)


H는 빠른 걸음으로 구두소리를 내며 깊은 당산역을 내려가고 있었다. H는 항상 당산역을 내려갈 때마다 서울의 직장인들에게 참 어울리는 장소라고 생각했다. 쉬지를 못하는 서울의 직장인들, 그리고 그들을 더욱 서두르게 하는 깊디깊은 당산역. H는 간신히 2호선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퇴근시간의 지하철은 항상 몸을 부대끼며 타야 했지만, H가 항상 기대하는 것이 있었다.

지하철이 소음을 내며 움직였고, 어둡던 지하철 창에 갑자기 주황빛이 눈이 부실 정도로 H에게 쏟아졌다. 한강에 낙조가 반사되고 있었다. 탁 트인 한강과 현대적인 빌딩들, 그리고 그 위로 쏟아지는 낙조를 H는 무척 좋아했다. 평생을 서울에서 살았지만, 언제 봐도 처음 서울에 올라오는 사람처럼 사진을 찍고 싶어지는 풍경이었다.

그리고 항상 H는 그 낙조를 보면서 감상에 잠기게 되었다. H는 이제 30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어쩌면 아직 젊은, 어쩌면 좀 어정쩡한, 그렇게 늙지는 않았지만 몸은 예전 같지 않은 나이였다. 그래도 H는 자신의 진로나 생활에 대해서 큰 걱정은 없었다. 범생이였던 H는 당연한 듯이 누구나 알 만한 대기업에 들어갔고, 이제 막 대리를 단 참이었다. 회사에서 어느 정도 인정받고 있었고, 돈도 어느 정도 모았다. 그러나 H는 한때 매일같이 울었다.




2. 우연(偶然)


다시 그때 생각에 잠기다 보니 금방 신촌역에 도착했다. 약간의 불쾌감을 안은 H는 예전 그때처럼 코젤 다크를 사기로 했다. 대신 안주는 없었다. 그리고 빌라에 들어섰다. 웬일로 빌라 복도와 계단에 불이 켜져 있었다. 그동안 H와 임차인들이 아무리 빌라 복도와 계단의 등을 바꿔 달라고 아우성을 쳐도 바꿔 주지 않았는데, 오늘 바꿔져 있었다. 덕분에 H는 공포감 없이 3층까지 올라갈 수 있었고, 자신의 방, 304호에 들어섰다.

H는 불을 켜고 책상 앞에 앉았다. 캔을 따자 흑맥주 향이 퍼졌다. H는 맥주를 홀짝거리며 유튜브를 멍하니 보고 있었다. ㄱ, 확실히 그는 자신을 너무나 괴롭게 했었던 사람이었다. 누구의 잘못도 없었는데 H는 ㄱ으로 인해 괴롭고 괴로웠고, ㄱ은 자신을 피하는 H에게서 약간의 불쾌감을 느꼈다.

그러나 이제는 상관없었다. H의 눈에는 유튜브 화면만이 어른어른 비치고 있었고, 눈빛은 텅 비어 있었다. H는 그때의 기억을 더듬어 보았고, 그때는 벌써 3년 전이었다. 대리였던 ㄱ은 과장이, 막 입사한 사원이었던 자신은 대리가 되어 있었다. 그만큼 자신도, ㄱ도 나이를 먹었다. 그렇다고 H는 자신이 성숙해졌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 ㄱ 같은 문제에 대처하는 방법은 터득했다고 생각했다. 아니, 단순히 닳고 닳아 둔감해진 걸지도 모른다고도 생각했다.

그때 H의 폰 화면에 유튜브 영상이 꺼지고 전화 수신 화면이 켜졌다. ㄱ이었다. H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H씨 집에 도착했어요?”

H는 집에서 쉬고 있었다고 했다.

“아 그렇구나. 아니 혹시 내일 저녁에 시간 괜찮은가 해서.”

내일은 수요일이었다. 약속이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ㄱ은 퇴근하고 자기와 간단히 한 잔 하자고 얘기했고, H는 약간의 긴장감을 느끼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ㄱ이 자신에게 할 이야기가 있다고?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오늘 할 일까지 H는 잘 마무리했다. 꼼꼼한 H는 실수를 남기지 않았다.
물론 ㄱ과의 술자리가 싫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엄연히 상사와의 단 둘의 술자리인 만큼, 걱정은 되었다.

H는 짧은 한숨을 쉬었다. 술맛이 뚝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H는 유튜브를 끄고 3분의 2가 남은 코젤 다크를 싱크대에 부어 버렸다. 그리고 약간의 불쾌감을 가지고 잠에 들었다.




3. 대면(對面)


항상 회사 건물을 나올 때의 밤바람은 기분이 좋았다. 더구나 요즘은 적당한 온도의 가을이었다. 다만 H는 ㄱ과의 술자리 때문에 약간 긴장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단둘이 걷게 된 H와 ㄱ은 ㄱ의 주도로 큰 의미 없는 이야기들을 하며 직장인들에 섞여 술집 골목으로 걷고 있었다.

ㄱ은 역시 타고난 사회생활형 사람이었다. 내성적인 H가 다소 맥아리 없이 대답하는데도 그의 입에서는 다음 주제가 술술 튀어나왔다. 요즘 자기네 애기가 4살이라 말이 너무 많아졌는데, 예쁘지만 좀 피곤하다는 이야기, 요즘 자기는 ‘지금 우리 학교는’에 빠져서 밤잠이 더 부족해졌다는 이야기, 요즘 골프 동호회 회원들의 돈 자랑이 너무 심해졌다는 얘기… H는 그의 말솜씨와 사회생활 능력에 놀라면서 동그래진 눈으로 끄덕끄덕 하며 듣고 있을 뿐이었다.

“여기에요.”

술을 좋아하는 ㄱ의 추천으로 간 이자카야 문을 열자, 따듯한 열기가 훅 불어오며 사람들의 말소리가 웅성웅성 들렸다. 어서 오시라는 큰 목소리, 직장 상사 욕을 하는 직장인들의 목소리. 진(眞)이라는 심플한 이름의 이자카야였다.

ㄱ은 여기서 가장 맛있는 것은 모둠 꼬치라고 했다. 그리고 자기가 살 테니 맛있는 술을 먹자고 했다. 그래서 H는 하이볼을 시켰다. H는 확실히 ㄱ은 자기와 다르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과장이기는 하지만 예전부터 씀씀이는 좀 남달랐다. 있는 집에서 태어나서 그런지. 아마 그럭저럭 사는 집에 태어나 안달복달 공부를 해 온 자기와는 많이 다른 삶을 살아온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곧 안주와 술이 나오고, H와 ㄱ은 하이볼 몇 잔을 마셨다. ㄱ은 워낙 잘 마시는 사람이었고, H도 못 마시는 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그리고 둘 모두 살짝 취기가 올랐을 때쯤, ㄱ이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저는 처음에는 H씨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ㄱ은 살짝 웃으면서 반농담조로 이야기를 꺼냈지만, 그 순간 H의 표정은 ㄱ이 바로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굳었고, H는 갑자기 하이볼 잔이 너무 차갑게 느껴졌다. 사람들 말소리도 뭐라고 하는 것인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갑자기 누군가 강가에서 밀어버려 물속에 빠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상사인 ㄱ 앞에서 불쾌감을 너무 티낼 순 없어서, H는 왜 그렇게 느끼셨느냐고 물어보았다.

“아니… 사실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왠지 나한테만 쌀쌀맞은 것 같아서.”

ㄱ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오해였다. 오히려 H가 ㄱ에게 느꼈던 것은 혐오감이 아니라 불가항력의 애정과 존경이었다. 똑 부러지지만 섬세한 H였다. 자신의 마음을 들킬 수는 없었다. 회사는 계속 다녀야 하고, 자기의 일은 완벽하게 해내야 하니까. 어차피 결혼한 ㄱ과는 이어질 수 없으니까. 자신의 마음이 들켰다간 회사에 소문이 나서 그만두어야 할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H는 거짓말과 가식은 못 하는 타입이었다. 그는 도저히 자신의 마음을 숨기고 가식적인 웃음을 ㄱ에게 보일 수 없었다, 그러기 싫었다. H는 ㄱ에게 거짓을 표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지금 할 수는 없었다. 아마 평생 못 할 것이다. 그러기로 결정했으니까. 대신, H는 처음으로 ㄱ에게 거짓말을 하기로 결심했다.

H는 ㄱ에게 그때 자기는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신입사원이어서 회사생활이 힘들었고, 그때 ㄱ은 너무 대단해 보여서 ㄱ 앞에서는 항상 긴장되었다고 대답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껍데기뿐인 답변이었다.

그러나 ㄱ은 사회생활에 유능한 것과는 달리 남들의 감정이나 애정표현에는 둔감한 면이 있어서, H의 말이 거짓말이라 생각하지 못하고 “아 그래요.” 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ㄱ은 그럼 이제부터 잘 지냈으면 좋겠다고, 이번에 H씨가 한 일을 보고 너무 잘 해내서 깜짝 놀랐다며 살짝 웃으며 건배하자고 했다. 둘은 살짝 건배하고 다시 술을 마셨다. H는 한편으로는 자신의 거짓말에 대한 의심이 없는 ㄱ의 태도가 수상했지만, 안도하며 그가 권하는 술을 계속 마셨다.




4. 이탈(離脫)


H는 자신의 생각이 느려진 것을 느끼고 있었다. 술을 마시면 둔감해진다는 점이 좋았다. 자신의 예민한 심기를 건드리는 것들도 괜찮아졌다. 그래서 행복해지는지도 모르겠다. 덜컹거리는 2호선은 여전히 시끄러웠지만, 이제는 괜찮았다.

당산역에서 출발한 지하철의 창밖으로 한강과 빌딩의 야경이 탁 펼쳐졌다. 한강은 검어서 거의 암흑처럼 보였지만, 빌딩들의 작은 불빛들은 충분히 아름다웠다. H는 약간 지쳤다고 생각했다. 사회생활을 썩 좋아하지 않는 H에게 ㄱ 같은 사회생활에 능숙한 사람, 심지어 상사인 사람과의 오랜 대화는 지치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생각지도 못하게 오늘은 다소 날카로운 말을 들은 참이었다. 어깨와 목이 뻐근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언젠가는 자신의 ㄱ에 대한 태도에 대해서 ㄱ과 이야기해야 할 것 같은 찝찝함을 항상 안고 살았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 솔직하게 이야기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H는 ㄱ과의 관계가 좀 더 부드러워진 것 같아 안도하고 있었다.

그때 취기 때문인지 H는 자기가 보고 있던 한강의 가을바람을 쐬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그래서 급히 합정역에서 내려, 택시를 잡아 여의도 한강공원으로 향했다. 얼마 안 가 도착했고,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선선한 강바람이 느껴졌다. 탁 트인 한강공원에는 돗자리 깔고 치맥 하는 사람들, 따릉이 타는 사람들이 있었다. H는 턱턱 걸어 난간이 있는 한강 바로 앞까지 갔다.

여기서 보는 마포대교와 저 넘어 빌딩들의 야경은 항상 황홀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밤이 되면 그 야경이 한강에도 어른어른 비치기 때문에 더 낭만적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한껏 들뜬 H는 질릴 때까지 이 야경을 보다 갈 생각이었다. 오늘은 큰 일 하나를 끝낸 날이기 때문에.

H는 미미한 웃음을 띠며 ㄱ을 생각했다. ㄱ은 참 멋지고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를 처음 본 때부터 지금까지 3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를 능가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그동안 자신은 연애는 고사하고 썸도 없었고, 앞으로 ㄱ을 뛰어넘는 사람을 찾아 연애를 할 자신도 없었다. 그러나 괜찮았다. 그대로 ㄱ은 자신의 마음속에 어떤 상징으로 남아있어도 괜찮았다. 연애를 안 하면 어떤가, 드디어 자신은 ㄱ이라는 황홀하고 가혹한 굴레에서 벗어났는데.

그동안의 시간들이 마치 술에 취해 2호선에 갇혀 있던 나날들 같았다. 술에 취해 몸을 싣고, 잠깐 졸았다 깨면 같은 역을 지나고 있는 2호선. 그 속에서 H는 영원히 ㄱ의 환영을 보며 2호선과 돌고 돌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의외로 해법은 간단했다. 아무리 순환하는 2호선이라고 해도 영원히 돌지는 않고, 막차 시간이 넘으면 멈춰야 했다. 3년이라는 시간은 사람을 늙게 하고, 마음을 초라하게 만드는 데에 아주 충분한 시간이었다. 결국 자신은 그 괴로운 시간들을 지나 막차 시간에 도달했고, 그대로 출구로 걸어 나왔던 것이다. ㄱ에 대한 기억과 그와의 관계는 그대로 가진 채로.

H는 어이없음에 피식 웃었다. 자신도 오만했던 것이다. 아무리 ㄱ이 이상적인 사람이라 해도 그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 절대 깨지지 않는 감옥처럼 영원할 것처럼 생각했던 것은 어린 생각이었다. 이제 간간이 폰 화면에 비친 자신의 얼굴엔 없던 주름이 조금씩 보였고, 자신의 얼굴은 제법 사회의 때를 탄 회사원 같아 보였다. 이제 더 이상 ㄱ에게 가졌던 감정과 같은 감정을 가지고 싶어도 그럴 수 없게 된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H는 이제 그만 집에 가서 내일 출근을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시 여의나루역으로 턱턱 걸어가는 그의 모습을 대학생 커플이 동그란 눈으로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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