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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머나먼 곳, 사람과 동물이 어우러져 사는 동물 왕국이 있었습니다.
동물 왕국은 매년 수확 철마다 축제를 열었고, 모두 음악을 즐기며 행복하게 보냈습니다.
임금님도 인자하셨기 때문에 왕국의 사람들과 동물들은 모두 행복했습니다.
*
그러나 왕국에는 한 가지 걱정이 있었습니다.
왕국의 이웃 나라 중에는 장미 왕국이 있었습니다.
장미 왕국은 장미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습니다.
장미들은 줄기가 사람의 두 팔과 두 다리처럼 뻗어 있었고, 옷을 입고 걸어다녔습니다.
머리의 자리에는 장미꽃이 항상 크게 피어 있었습니다.
장미 왕국은 장미 대왕이 다스렸는데, 장미들 중에서도 꽃과 몸집이 크고, 향기도 진했고, 가시도 날카로웠습니다.
장미 왕국은 호시탐탐 풍족한 동물 왕국을 노렸기 때문에, 동물 왕국의 걱정거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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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동물 왕국은 임금님과 동물 신하들이 지키고 있어 든든했습니다.
사자, 독수리, 개, 고양이… 모두 충성스러운 신하들이었지만, 늑대 기사가 유독 충성스럽고 용맹했습니다.
늑대 기사는 항상 임금님의 곁을 지키며 총애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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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왕국에 기쁜 일이 생겼습니다. 공주님이 태어난 것입니다.
임금님과 왕비님이 그토록 기다렸던 아이였기에, 왕국 사람들과 동물들 모두 정말 축하했습니다.
“정말 축하드립니다, 임금님 왕비님. 공주님은 제가 꼭 지키겠습니다.”
늑대 기사는 임금님과 왕비님께 맹세했습니다.
임금님은 늑대 기사가 있어 든든했습니다.
늑대 기사는 그날부터 눈이 오든 비가 오든 항상 수련하며 이빨과 발톱을 날카롭게 갈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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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동물 왕국 밖에서 시끄러운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장미 대왕이 장미 기사들을 이끌고 동물 왕국에 쳐들어온 것이었습니다.
“너희 나라 공주를 인질로 넘기면 더는 쳐들어오지 않겠다!”
장미 대왕은 장미 향기를 물씬 풍기며 소리쳤습니다.
장미 대왕은 동물 왕국을 두려워했기에, 공주님을 인질로 잡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때였습니다. 분노한 늑대 기사가 울부짖으며 성문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으악!”
늑대 기사의 재빠른 몸짓에 장미 대왕은 순식간에 큰 상처를 입었고, 장미 기사들은 황급히 장미 대왕을 데리고 장미 왕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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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 기사의 활약으로 동물 왕국은 다시 평화를 되찾았고, 어느덧 공주님이 태어난 지 100일이 되었습니다.
임금님은 성대한 축제를 열었고, 동물 신하들도 모두 참석했습니다.
임금님은 동물 신하들에게 공주님을 한 번씩 안아 보라고 했습니다.
동물 신하들은 공주님에게 염원을 담은 말을 한마디씩 했습니다.
“아름다워지세요, 공주님.”
“건강하세요, 공주님.”
“사랑받으세요, 공주님.”
늑대 기사의 차례였습니다. 늑대 기사는 깃털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공주님을 안았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늑대 기사의 털 속에 박혀 있던 장미 가시가 공주님의 얼굴을 찌르고 말았습니다.
“으앙!”
공주님의 얼굴에 빨간 피 한 방울이 맺혔고, 늑대 기사도 당황했습니다.
늑대 기사를 아끼던 임금님이었지만 크게 노했습니다.
결국, 늑대 기사는 이 일로 성문을 지키는 문지기가 되었습니다.
늑대 기사는 공주님을 다시 보지 못하게 되어 슬펐지만, 한편으로는 성문 밖에서나마 공주님을 지킬 수 있어 안도했습니다.
늑대 기사는 성문 앞에 작은 오두막을 짓고, 그곳에서 언제나 동물 왕국의 성문을 지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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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17년이 지나 공주님은 17살이 되었습니다.
장난기 많은 공주님은 이리저리 뛰어다녔고, 자주 웃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공주님은 동물 왕국 성벽 근처의 숲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호기심 많은 공주님은 숲속 깊은 곳까지 들어갔습니다.
여름이라 우거진 숲속에서 하늘을 보면 초록빛 잎사귀들이 하늘을 가리고 있었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고, 짙은 여름 냄새가 났습니다.
그러다 공주님은 숲속에서 떨어져 있는 꽃잎을 발견했습니다.
처음 보는 아주 빨간 꽃잎이었습니다.
꽃잎은 몇 걸음 앞에 하나가, 몇 걸음 앞에 또 하나가 떨어져 있었습니다.
꽃잎들을 따라가자, 단단한 성벽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성벽 밑에 작은 구멍이 나 있었습니다.
딱 공주님이 지나갈 정도의 크기였습니다.
공주님은 호기심이 생겨 그 구멍을 지나갔습니다.
그러자 난생 처음 보는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끝도 없이 땅이 펼쳐져 있었는데, 황량한 모래 뿐이었습니다.
나무와 풀이 우거진 성 안과는 딴판이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고, 무거운 꽃향기가 공주님의 코를 찔렀습니다.
장미 기사였습니다.
장미 기사는 가시줄기 팔을 뻗어 공주님을 낚아채려 했습니다.
공주님이 소리를 지르며 도망치려 하자, 누군가 갑자기 장미 기사 앞을 막아섰습니다.
남루한 옷을 입은 늑대였습니다.
공주님은 누구인지 모를 늑대의 등장에 놀랐지만, 장미 기사는 늑대가 누구인지 아는 눈치였습니다.
곧이어, 장미 기사는 말을 반대로 몰아 도망쳤습니다.
“당신은 누구시죠?”
공주님이 물었습니다.
그러자 늑대는 공주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렸습니다.
“오랜만입니다, 공주님. 언젠가 이런 일이 생길 것 같아 항상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 늑대는 문지기 늑대였습니다.
늑대는 자신의 오두막에서 공주님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들, 장미 왕국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공주님의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습니다.
공주님은 늑대를 꼭 안아 주었습니다.
“다시 성 안으로 돌아가요.”
공주님은 늑대를 이끌고 성문으로 들어갔습니다.
*
공주님은 늑대를 데리고 임금님에게 가서 방금 있었던 일을 설명해 드렸습니다.
임금님은 화를 내다가 근심 어린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공주님과 함께 온 늑대를 쳐다보았습니다.
임금님은 늑대를 안아 주며 늑대에게 진심으로 사과했습니다.
임금님은 늑대에게 큰 상을 내렸고, 다시 성 안에서 공주님을 지켜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늑대는 그 부탁을 흔쾌히 받아들였습니다.
임금님은 공주님에게는 성 안에서 얌전히 지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공주님은 임금님의 부탁을 거절했습니다.
“저는 늑대에게 검술을 배우고 싶어요.”
임금님은 공주님이 걱정되어 말렸지만, 공주님은 완강했습니다.
결국 임금님은 공주님의 뜻에 따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동물 왕국 제일의 대장장이를 시켜 늑대의 발톱을 닮은 날렵한 검을 만들도록 했습니다.
그날 이후 공주님은 늑대를 언니라 부르며 따르기 시작했고, 둘은 매일 왕국을 모험하며 검술 훈련을 이어 나갔습니다.
*
공주님이 20살 되던 해, 어느 깊은 가을밤이었습니다.
공주님은 성의 높은 탑에 있는 자기 방 창가에서 푸른 보름달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선선한 가을 밤바람이 기분 좋게 불고 있었습니다.
그때, 익숙한 꽃향기가 바람에 섞여 왔습니다. 장미 향기였습니다.
공주님은 늑대를 빠르게 깨웠고, 자기 칼을 챙겨 늑대와 함께 말을 타고 나갔습니다.
성문 밖으로 나가니 그림자 속에 말을 탄 무리가 보였습니다.
곧이어 달빛에 그들의 얼굴이 드러났습니다.
맨 앞에 무서울 정도로 큰 장미꽃이 있었습니다.
장미 대왕이었습니다.
공주님은 처음 보는 그 거대한 모습과 무거운 향기, 날카로운 가시에 겁을 먹었습니다.
늑대는 공주님의 옆에서 겁먹지 말라고 이야기하며 공주님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공주님은 자신의 칼을 꼭 잡았습니다.
장미 대왕은 장미 문양이 박힌 큰 칼을 휘둘러 공주님을 잡아 올 것을 명령했습니다.
장미 기사들이 달려들었습니다.
늑대가 말을 타고 기사들 사이로 질주하면서 날카로운 발톱으로 기사들을 쓰러뜨렸습니다.
그러나 수가 너무 많아 기사들에게 둘러싸이게 되었습니다.
늑대가 장미 기사들에게 포위된 틈을 타, 장미 대왕은 가시 줄기 팔을 공주님에게 길게 뻗었습니다. 공주님은 가까스로 피하면서 자신의 칼로 장미 대왕 팔에 상처를 냈습니다.
그리고 칼로 장미 대왕의 줄기를 베면서 빠르게 말을 타고 장미 대왕에게 접근했습니다.
“으악!”
장미 대왕이 머리의 꽃에서 붉은 피를 흘리고 있었습니다.
공주님의 칼이 장미 대왕의 몸 줄기에 깊게 꽂힌 것이었습니다.
곧이어, 장미 대왕은 말에서 떨어졌습니다.
그 광경을 본 장미 기사들은 장미 대왕의 시신을 거두어 도망가 버렸습니다.
공주님은 싸움으로 지쳐 있는 늑대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늑대는 달빛을 받으며 웃고 있는 공주님의 얼굴을 넋이 나간 표정으로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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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에는 축제가 열렸습니다.
그동안 왕국의 걱정거리였던 장미 대왕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임금님이 중요한 발표를 할 것이라고 미리 이야기하신 참이었습니다.
임금님이 성의 높은 곳에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 양옆에는 공주님과 늑대가 늠름하게 서 있었습니다.
임금님은 목을 가다듬고 이야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장미 대왕을 쓰러뜨린 공주님과 늑대를 칭찬하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나는 용맹한 나의 딸에게 내 자리를 물려주고자 한다.”
공주님과 모두 놀라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동물 왕국의 모두는 공주님에게 환호를 보냈습니다.
임금님은 왕관을 벗어 공주님에게 넘겼고, 공주님은 그 왕관을 받아 모두를 바라보며 왕관을 썼습니다.
사람들은 더 큰 환호를 보냈습니다.
늑대는 새 임금님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습니다.
*
새 임금님은 왕국을 평화롭게 다스려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고, 늑대는 항상 임금님의 등 뒤에서 임금님을 지켰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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