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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등 하나 없었다. 땅에는 검은 아스팔트가 깔려 있었고, 하늘에는 구름 하나, 달 한 점 없었다. 우리 옆으로는 시멘트 축대만이 낮게 늘어서 있었다. 저 사람들은 언제까지 우리를 좇아오는 걸까? 우리가 굳이 이렇게까지 쫓겨야 하나? 우리는 계속 달렸다. 그녀는 조금 지쳐보였다. 안 돼, 지치지마. 지금 멈추면 안 돼. 어쩔 수 없이 멈춰 섰다. 그리고 맞닥뜨렸다. 역시 검은 옷이구나. 검은 옷을 입은 남자 둘이 우리 뒤에 섰다. 그들은 아무 말이 없다. 역시 그렇구나. 우리를 잡는 것 외엔 목적이 없을 테니까. 말을 해서 굳이 그들에게 득이 될 것은 없다. 검은 구두가 잘 보이지도 않는 아스팔트 위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싸워야지, 별 수가 없다. 그들과 내 몸이 밤 속에서 겹쳐 보이게 되고, 큰 소리 없이 부딪히는 소리만 가끔 들렸다. 그리고 우리는 시간을 잠깐 벌었을 뿐, 다시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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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이 너무 가쁘다. 맞은 오른 쪽 뺨이 얼얼했다. 안 돼, 못 뛰어. 폐 쪽이 아파왔다. 왜 이렇게 쫓긴 걸까 도대체. 숨이 너무 찬다. 그녀도 고개를 못 들고 있다. 축대가 여전히 서있다. 내 키도 안 되는 축대를 왜 세운 거지? 공원인지, 주차장인지 모르겠다. 적당히 트여있고, 적당히 숨겨져 있다. 간신히 고개를 드니 달이 조금 보인다. 아, 오늘 구름이 있었구나. 달은 밝은데 구름에 조금 가려져있다. 구름이 달빛에 빛나는 게 보인다. 이렇게 보면 항상 어항에 갇혀있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녀는 말수가 별로 없다. 그래, 넌 원래 그랬지.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깊어 보이지 않는다. 서로 별 말은 없어도, 서로를 배려한다거나 느끼는 마음은 눈동자에서 보였다. 서로에 대한 신뢰와 애정은 깨진 적이 없었다. 항상 우리는 눈에서부터 서로를 읽었고, 서로를 읽을 때마다 그 믿음과 마음 또한 읽을 수 있었다. 짧게 입을 맞췄다. 이제야 조금 안도감이 든다. 이제 가야 한다, 항구로. 더 이상 여기에 우리가 머무를 곳은 없다. 우리는 도망쳐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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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을 넘어가보니, 검은 바다와 작은 불빛들이 보였다. 검은 바다 위에 배로 오르는 문이 보였고, 우리는 거기에 올랐다. 복도에 풀린 다리를 쉬게 하며 앉았다. 숙소에 들어갈 수 있는 처지도 아니고, 여기서 밤을 보내야겠지. 작은 타원형 창문 너머로 바다가 보인다. 바다도 검고, 하늘도 검었다. 이 배는 어디로 가는 걸까? 얼마나 배에 몸을 실어야 할까. 그녀는 화장실을 다녀온다고 했다. 나는 너무 피곤하다. 배는 부드럽게 조금씩 기울어졌다. 배의 엔진 소리가 바다 속의 소리처럼 들려온다. 눈이 감긴다. 조금만 자는 건 괜찮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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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회색뿐이었다. 창문 바깥엔 회색 하늘과 회색 바다가 보였다. 안개가 끼었나보다. 일어나서 창문 앞에 섰다. 아래를 보니 바다가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안개가 끼기도 했지만, 배의 높이가 엄청났다. 무언가 어두운 색으로 칠해진 배의 표면은 고층 빌딩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높았다. 파도가 꽤 치는 것 같은데도, 잔물결 정도의 크기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배가 크다보니 꽤 멀리까지 보였는데, 바다는 더 짙은 회색이고, 하늘은 더 밝은 회색일 뿐이었다. 도대체 이 배는 얼마나 큰 걸까. 배에 오를 때부터 이 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올랐다. 우리에게는 배를 가릴 여유도 없었고, 떠날 수단이 있다면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탔구나. 배 안을 조금 둘러보아야 할 것 같다. 그런데 그녀가 없다. 우리는 몸밖에 이 배에 싣지 않았다. 그녀의 짐도 있을 리 없고, 그녀를 찾을 방법도 없다. 어디 간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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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랜 시간 복도에 앉아 머물렀다. 창문 밖은 조금 더 밝아졌을 뿐, 여전히 회색빛이다. 그녀는 오지 않았다. 어딘가에서 일이 길어지고 있는 걸까. 그녀를 찾으러 가보아야 할 것 같다. 배에는 묘하게 사람이 없다. 지금이 몇 시지? 사람이 없을 시간인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철로 된 바닥이 소리를 낸다. 위로 이어지는 계단 밑을 지나 계속 걸었다. 여긴 갑판 쪽이었구나, 갑판이 나왔고 안개 냄새와 바다 냄새가 묘하게 섞여 편안한 느낌을 준다. 앞은 얼마 보이지 않는다. 배가 어디로 가는지 여전히 감은 잡히지 않는다. 이 배는 얼마나 큰 걸까.. 계속 돌아다녀보기로 했다. 위로 이어지는 계단을 한 걸음씩 올라갔다. 위층은 내가 잠을 잤던 곳과 아주 달랐다. 천장은 답답함을 느끼지 않을 만큼 높았고, 옆에는 창문들이 크게 나있어 바깥이 보였다. 약간 오래된 느낌의 가로등이 불이 켜지지 않은 채로 간간히 서있었다. 공원이라 해도 좋을 정도였다. 앞을 보면 저 멀리까지 보이는, 트인 공간이었다. 가로등 사이엔 간간히 벤치가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아는 건 아니라서, 일단 앉았다. 사람들은 가끔 지나갔다. 옛날 영국 스타일 같은 옷들이 지나갔다. 트렌치코트, 중절모, 클래식한 양복. 배 안인데도 안개가 낀 것처럼 느껴졌다. 사람들은 그저 걸을 뿐이었고, 그저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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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 보니 작은 시가지 같은 곳에 다다랐다. 이 배는 얼마나 큰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중앙에 자그마한 공간이 있었고, 골목 곁으로는 가게들이 있었다. 바닥과 가게들도 회색빛을 띄고 있었다. 회색 석재를 쓴 것 같았다. 사람들이 쇼핑백을 들고 여유롭게 걸어가고 있었다. 아이들도 있었고, 가끔 검푸른 제복을 입은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다들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 배에 대해서, 배 안의 사람들에 대해서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그녀와 내가 이방인처럼 느껴질 정도로, 배 안의 사람들은 하나의 사회를 이룬 것처럼 보였다. 각자의 길을 걷고 있지만 나름의 규칙이 있어보였고, 각자 자신의 사정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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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안은 짙은 나무색으로 인테리어 되어있었다. 탁자도 짙은 갈색의 나무 탁자였고, 바닥도 짙은 색의 나무 마루였다. 전등들은 편안한 주황빛을 퍼뜨리고 있었다. 커피 안을 들여다보니 밑이 보이지 않는 진한 갈색이었다. 배에 오른 지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나에겐 시계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배라는 것을 잊을 만큼 이 배는 안정적이었다. 커피의 수면도 거의 흔들리지 않았다. 아까까지 낯선 곳에서 돌아다니다 그저 카페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사람들의 말소리는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 낮게 깔려 들려왔다. 멀지 않은 곳에 제복 입은 남자들이 앉아있었다. 저 먼 곳, 카페 안 쪽에는 창이 나 있었다. 어느덧 해가 진 것이 보였다. 회색빛이던 창밖이 검정빛이 되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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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배 밖의 안개는 걷히지 않았다. 배의 다른 층으로 가보기로 했다. 여전히 금속성 소리를 내는 창백한 계단을 지나 다른 층으로 올라갔다. 짙은 남색의 제복들이 눈에 띄었다. 유독 군인들이 많은 곳이었다. 밖은 아직 회색인데도, 제복 색들이 눈에 띄어 이질감이 들었다. 주변에는 군인들이 훈련을 받고 있었다. 그렇게 그곳을 둘러보던 중에 키 큰 군인이 내 앞에 섰다. 그는 내게 무슨 일로 여기에 왔느냐고 물었다.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나는 이곳에 온 목적이 없었다. 단지 그녀를 찾고 있을 뿐. 오른편을 보니 군인들이 칼을 던지는 훈련을 하고 있었다. 교관이 시범을 보이는 중이었는데, 각각의 칼이 과녁에 정확히 꽂히고 있었다. 익숙한 느낌의 솜씨였다. 손을 길게 뻗어서 칼을 과녁에 꽂는 것과 같은 느낌을 주는 실력. 그리고 그 교관이 시범을 마치고 모자를 벗었을 때,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그 교관은 그녀였다. 왜 이런 곳에서 교관을 하고 있을까? 물음에 대한 답변을 생각하기도 전에 그녀와 눈이 마주치고, 우리는 서로 달려가 안겼다. 익숙한 머리카락이 내 얼굴에 닿았다. 제복의 안으로 그녀의 몸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맞구나. 안도하며 눈을 잠시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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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숙소는 한 면이 방 안쪽으로 경사진 창문으로 되어있는 침실이었다. 그녀의 침대는 꽤 크고 안락했다. 그녀와 침대에 앉아 창문을 보니, 안개 사이로 햇빛이 비쳐 들어오고 있었다. 내내 회색이었던 하늘은 점차 흰 색으로 가까워지고 있었고, 바다는 그런 하늘빛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그녀는 얇은 재질로 된, 화려한 색과 무늬를 띄고 있는 긴 드레스 같은 옷을 입고 내 옆에 앉아있었다. 그녀의 뚜렷한 듯, 몽환적인 얼굴과 잘 어울렸다. 어느새 해가 다시 뜨고 있다. 이 배는 어디로 가는 걸까? 왜 그렇게 우리는 쫓겼던 걸까? 결국 배는 언젠가 도착하겠지, 어딘지 모를 곳에. 우리는 다시 땅에 발을 디딜 것이다. 다시 쫓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쩌면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안정과 구원을 받을지도. 우리가 그토록 원했던, 천천히, 그 시간만을 위해서 걷고, 다시 돌아갈 안락한 곳이 있는 나날들. 그녀가 나를 보고 있다. 그녀의 눈을 보면 항상 그 깊이를 가늠해보느라 시간을 할애하고, 생각에 빠지곤 한다. 나는 어떤 공간에서 천천히 떨어지고 있고, 그 주변을 둘러보느라 할 말과 다른 생각을 잊어버린다. 하지만 그 무한의 감각은 어느새 수렴해서 나의 마음과 닿게 된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매료돼있고, 서로를 이해한다. 그녀와 이렇게 편안한 시간을 보낸 것도 얼마만인가? 보지 못했던 햇살이 창에서 들어온다. 희고 뿌연 빛이지만, 뿌연 빛이 점점 걷히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그녀가 내 옆으로 눕고, 그녀와 내 몸이 겹쳐진다. 그녀의 눈빛에 멈췄던 생각이, 빛에 조금 더 밝아진 회색 천장을 보며 다시 이어진다. 언젠가 우리는 배에서 내릴 것이다. 그리고 땅에 발을 딛고 나아갈 것이다. 지친 발걸음이고, 어딘가 있을 거라 생각하는 작은 꿈을 위한 발걸음이기도 하다. 어쨌든 걷게 되겠지. 그래, 걸으면 된다. 일단 걷는 거다. 답을 찾으면서. 걷겠다는 생각도 못했었는데, 일단 걷자고 생각하니 조금 마음이 편해진다. 이제야 침대의 매트릭스가 푹신하다고 느껴진다. 아마 괜찮을 거다, 우리는… 밖은 여전히 조금씩 밝아지고 있고, 나는 잠시 눈을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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