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우화

혹사 (2019. 2. 4.)

  하민은 집을 나섰다. 그에게는 자유가 주어졌다. 그는 여러 가지를 꿈꾸었다. 더이상 분 단위로 시간을 쪼개는 일 따위는 없다. 세상은 이제서야 그의 눈 앞에 모습을 드러냈고, 그는 처음으로 세상이란 존재를 공기에서 느꼈다.

  그가 처음으로 집을 지을 때쯤,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새로 온 사람을 좋아했다. 새로 온 사람의 서투름, 물들지 않은 마음을 좋아했다. 곧이어 그들은 여러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마을에 대한 얘기들. 저 동산 건너편에는 사이가 안 좋은 마을이 있었고, 계곡 어딘가에서는 아이가 굶고 있었다. 곧이어 이런 이야기들은 하민의 마음을 사로잡아 갔다.

  하민이 집의 벽을 반쯤 지었을 때쯤, 하민은 마을 사람들과 일을 시작했다. 하민은 마을 사람들의 제안에 따라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다. 어딘가에서는 글을 모르는 할아버지를 대신하여 편지를 썼고, 어딘가에서는 마을 저수지를 지키기 위하여 싸움을 했다. 하민의 마음 속에서 점점 자유의 느낌은 잊혀져 갔다.

  하민의 집은 벽이 어느 정도 올라간 상태로 남겨졌다. 지붕은 없었고, 바닥엔 집의 재료들이 쌓여 있었다. 비가 오면 비가 쏟아졌고, 구름이 끼면 구름이 보였다. 하민은 더이상 집에 애정을 두지 않았다. 가끔씩 집에서 자는 날에는 하민은 구석에 웅크려 이불도 없이 잠을 잤다. 대신 그는 마을 사람들과 하루종일 어울렸으며, 그들과 항상 마을 일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하민이 집을 나선 지 1년쯤 되었을 무렵, 하민의 볼은 광대를 드러내고 있었다. 수염은 자랐고, 눈 밑엔 피로가 새겨져 있었다. 하민은 더이상 집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동산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마을 사람들의 부름만을 기다렸다. 마을 사람들은 항상 그를 필요로 했다.

  하민은 정말 오랜만에 집에서 눈을 떴다. 지붕도 없이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구름이 낀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벽은 젖어있었다. 바닥엔 물을 머금은 나무 막대들과 판자들, 모래가 쌓여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이미 집의 일부가 되었어야 했다. 그것들은 점차 썩어가고 있었다. 하민은 오랫동안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어둠이 보였다. 어둠은 동공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눈에서 뻗어나온 어둠을 역으로 따라가다 보면 끝도 없는 공허가 나왔다. 하민은 처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보았다.

  하민은 자신의 짓다 만 집에 일주일째 틀어박혔다. 하루는 비가 오고, 하루는 구름이 해를 가렸다. 내내 비슷한 날씨였다. 사람들은 그를 걱정해서 종종 찾아왔다. 하민은 사람들의 말에 대답은 했지만, 바닥에서 일어나는 법은 없었다. 그는 항상 바닥과 쌓여 있는 나무들에 눈길을 주고 있었다. 하지만 초점은 없었다. 사람들은 그의 생각을 알 수 없었다.

  하민이 누워 지낸 지 한 달째, 비가 그쳤다. 벽에서 물방울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물방울은 하늘을 비추고 있었다. 하민은 오랜만에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지어지지 않은 지붕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하민은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흐느끼는 소리와 눈물은 길게 이어졌다.

  그리고 일주일 뒤, 하민은 집 밖으로 나섰다. 길어졌던 수염은 깎여 있었다. 길어진 머리도 뒤로 넘긴 모습이었다. 사람들은 그에게 안부를 물었다. 이제 괜찮으냐고. 하민은 아직 광대가 드러난 마른 얼굴로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잔디밭 위에서 기지개를 폈다. 오랜만에 느끼는 초원의 바람이었다. 하민은 오랜만에 웃을 수 있었다.

  다시 비가 오는 계절이 지나갈 무렵, 하민의 집의 지붕은 뼈대 위에 기와가 쌓이고 있었다. 아직 벽의 어딘가에는 물기가 남아있었고, 바닥엔 아직 나무 막대들이 남아있었다. 가끔 하민은 자신의 집을 돌아보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끔은 마을 일들을 도왔다. 그러나 마을 일을 한 날도 꼭 기와 한 장을 올렸다.

  하민은 이제 집에서 잠을 잘 수 있었다. 하민은 자기 집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가끔씩은 엷게 웃는 얼굴로, 가끔씩은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그는 자신의 집에서 매일 잠들었다.

'우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망(逃亡) (2019. 7. 2.)  (0) 2019.07.09
결국은 (2019. 3. 22.)  (0) 2019.07.09
기억 속에 (2019. 2. 20.)  (0) 2019.07.09
새벽 (2019. 5. 6.)  (0) 2019.07.09
배 (2016. 12. 5.)  (0) 2019.07.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