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시 17분이었다. 눈앞은 푸르스름하게 밝아지고 있었고, 이름 모를 호텔 빌딩이 높이 서 있었다. 은행 빌딩, 공사 빌딩… 건물은 빽빽이 들어서 있었고, 차는 이 시간까지도 많이 다녔다. 넓게 트인 사거리는 발길을 재촉하는 차들이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매번 오는 길인데도 춥고 쓸쓸했다.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나는 혼자서 다시 길을 걸어가 집으로 가야만 했다. 4시간 뒤에는 수업이 있었다. ‘집에 가서 샤워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집에 가면 여지없이 뻗어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결국 여느 날처럼 강의실에 가서 한잠 자기로 했다. 집에서 잠들지 못한 지 3일째였다.
12시. 술자리는 아직 한창이었다. 오늘만큼은 죽어도 집에서 자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역시 소맥 세 잔과 함께 사라졌다. 나는 애들에게 신촌으로 가자고 매달렸다. 오늘은 학교 앞에서 죽어도 마시기 싫었다. 나는 학교 앞의 그 음침한 술집들이 싫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술집으로 쫓겨난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아직 어리다, 이런 곳에서 술 마시기엔 하루하루가 아깝다고 생각한 나는 취한 애들을 이끌고 신촌으로 향했다.
2시. 나는 내가 매우 취했다고 생각했다. 감각이 둔해지고 생각이 느려진 게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분명 여기는 담배 연기로 꽉 차 있을 테고, 음악 소리도 귀가 찢어질 듯이 클 터였다. 그런데 음악은 웅웅 울리는 것 같았고, 담배 냄새는 나지 않고 고소한 냄새만 살짝 날 뿐이었다. 아, 담배. 담배 생각이 나 하나 꺼내 불을 붙였다. 곧 술집에서 담배도 못 피우게 된다던데… 상상이 잘 되지 않으면서도 섭섭했다. 애들은 옆에서 말도 안 되는 연애 얘기로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고, 또 어떤 애들은 홀에 있는 포켓볼을 치고 있었다. 나는 연애에 대해서도 할 얘기가 없었고, 지금 포켓볼은 도저히 치지 못할 것 같았다. 그저 소파 같은 의자에 고개를 위로 젖히고 머리를 뉘였다. 어두운 가운데 보라색 조명이 몇 개 보였다. 내일 학생회 회의가 걱정이었다.
11시. 어제는 집에 어떻게 들어갔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거의 눈 감고 들어간 것 같았다. 그래도 오랜만에 집에서 잔 날이었다. 그리고 정신없이 강의를 듣고, 회의를 잘 마치고 학생회 애들과 뒤풀이에 왔다. 일단 회의를 마쳤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 덕분인지 술기운이 안락하게 느껴졌다. 취해서 둔감해진 이 기분이 좋았다. 맨 정신엔 너무 예민해진 채로 있어야 했다. 항상 어디서 일이 터질지 몰랐고, 내 말이 어떤 씨가 될지 몰랐다. 그저 편한 사람들과 하는 편한 술자리가 좋았다. 나는 항상 걱정이었다. 내가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몰랐고, 선배들을 보아도 답을 잘 알 수 없었다. 항상 지금만을 생각했다, 지금 하는 학생회 일, 지금 하고 있는 동아리, 나랑 친한 사람들, 술친구들. 애써 앞날을 생각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나만 그런 건 아니었다. 술을 마실 때마다 우린 목이 쉬도록 서로 떠들고 싸웠지만, 사실 그 저변에는 방황이 깔려 있었다. 우리에겐 내일이 없었다, 내일이 오지 않기를 한편으로는 바랐다.
3시, 신촌 탐앤탐스에 왔다. 아메리카노를 시켰고, 노트북을 켰다. 이 시간이 제일 싫었다. 한겨울엔 더 좋지 않았다. 여기서 자고 나가면 뒷목이 뻐근했고, 피가 쏠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해야 했다, 내일까지 할 일이 있었다. 여기 앉아서 반복되는 음악을 듣다 보면 정신없는 술자리에서 들었던 이야기들이 머릿속에서 반복되었다. 연애하는 친구에게 연애하면 좋으냐고, 마음에 충만함을 느끼느냐고 물어봤었다. 걔는 피식 웃으면서, 아까도 싸우고 왔다면서 헤어질까 고민 중이라고 했다. 걔는 그것보다는 취업이 걱정이었다. 자소서도 써야 하고, 면접 준비도 슬슬 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연애를 깔보면서도 한편으론 연애를 동경했다. 큰 의미는 없지만, 하는 게 안 하는 것보다는 나은, 반복되는 게임과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뭐… 점점 그런 의미조차도 사라지고 있었다. 우리는 더 이상 연애에 기댈 나이가 아니었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 연애는 대숲에서 사람 찾는 것만큼 의미가 없다는 걸.
4시. 온통 깜깜했고 집에 오고 있었다. 파한 지는 오래였다. 그저 술 마신 자리가 신촌이어서 우리 집까지 오래 걸릴 뿐이었다. 차들은 여전히 급하게 달리고 있었고 나는 치솟은 빌딩 옆으로 쥐처럼 붙어 걸어 다니고 있었다. 머리가 아팠다. 술기운이 깨는 중인 것 같았다. 난 너무 지쳐 있었다. 이대로 여기에 눕고 싶었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그저 아픈 다리를 움직여 집으로 가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해가 뜨는 걸 보는 건 싫었다. 사실 해가 지는 광경도 싫어했다. 하루가 시작되면 다시 무언가 힘든 일을 해야 했고, 하루가 질 때쯤이면 오늘 한 게 없다는 느낌과 함께 내일에 대한 걱정이 몰려왔다. 지금은 대학생이었지만, 1년 뒤 혹은 2년 뒤엔 나는 무엇일지 몰랐다. 아버지의 퇴직은 가까워 오고 있었다. 아버지는 항상 쉬고 싶다고 말했다. 다시 걸으면서 두통이 몰려왔다. 오늘은 또 강의를 듣고 회의를 하겠구나. 그런데 내년엔 군대에 가야 할까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준비해야 할까… 준비한다고 될 일인지도 모르겠다. 내 친구는 오늘 열람실에서 밤을 새웠겠지, 난 그저 휘청이면서 걷고 있을 뿐인데. 지금 집에 들어가서 자면 도저히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지쳐서가 아니라, 다시 내일이 오는 게 두려워서.
학생회실에 있는 긴 3인용 의자에 누우면 흰 천장이 보였다. 아무것도 없는 풍경이지만 술이 덜 깨 빙빙 돌았다. 차라리 술기운에 지쳐 자는 게 나았다. 맨 정신엔 온갖 고민들이 밀려 와서 숨이 막히니까. 오늘도 억지로 지치게 만든 몸으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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